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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쇠팔’ 최동원이 9월에 남긴 것 [오상민의 현장]

[비즈엔터 오상민 기자]

▲2011년 9월 14일 우리 곁을 떠난 고 최동원의 생전 모습. 그는 한국 야구의 영원한 레전드로 재평가받고 있다. (사진=뉴시스)

벌써 3년이 흘렀다. 2011년 9월 14일, 영웅은 거짓말처럼 우리 곁을 떠났다. ‘무쇠팔’, ‘영원한 레전드’, ‘한국 야구의 전설’이라 불리던 사나이. 故 최동원이다.

최동원에게 9월은 모든 것을 앗아간 계절이지만 많은 것을 되찾아준 계절이기도 하다. 대장암 투병 끝에 세상을 등진 후 그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등번호 11번은 롯데의 영구 결번이 됐고, 지난해 9월 부산 사직야구장에는 최동원 동상이 건립, 진정한 영웅으로 야구팬 앞에 다시 섰다.

그는 분명 영웅이었다. 경남고 2학년이던 1975년에는 고교 최강 경북고를 맞아 노히트노런을 기록했고, 다음 경기인 선린상고와의 경기에서도 8회까지 노히트노런을 이어가 17이닝 노히트노런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다.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는 당대 최고의 ‘원투펀치’ 김시진과 김일융, 홈런왕 이만수, 교타자 장효조 등 막강 화력을 자랑하던 삼성 라이온즈를 상대로 혼자서 4승을 책임지며 롯데에 우승을 안겼다. 당시 최동원은 1ㆍ3ㆍ5ㆍ6ㆍ7차전에 등판해 삼성의 다이너마이트 타선을 잠재웠다.

무엇보다 그가 영웅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성실성과 희생정신이 뒷받침된 천재였다는 점이다. 누구보다 뛰어났지만 늘 자기개발을 위해 최선을 다했고, 팀을 위해 몸을 던져 희생했다. 최고의 자리에 있었지만 나보다 남을 먼저 배려했고, 소외된 선수들의 복지 개선을 위해 앞장섰다. 1988년 선수협의회 결성에 앞장선 것도 그런 목적에서였다.

▲1984년 한국시리즈 MVP에 선정된 최동원. 30년 전 그날은 최동원의 생애 최고의 순간이었다. (사진=뉴시스)

그러나 최동원의 순수한 열정과 노력은 각 구단의 강한 반발에 밀렸고, 선수협 결성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때부터 롯데와 최동원 사이엔 오해의 불씨가 싹트기 시작했다. 명예욕에 사로잡힌 최동원이 불순한 의도로 선수협 결성을 주도했다는 오해 때문이다. 결국 최동원은 그해 11월 삼성 투수 김시진과 맞트레이드 되는 수모를 겪었다.

최고 투수에서 나락으로 떨어진 최동원은 재기를 노렸다. 그러나 세상의 온갖 편견과 오해의 벽을 혼자서 허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롯데를 떠났다는 아픔보다 “최동원도 이젠 한 물 갔구나”라는 비아냥거림이 그를 더 지치게 했다. 결국 32살 청년 최동원은 1991년을 끝으로 야구장을 떠났다.

은퇴 후에는 지도자의 길을 걷고 싶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선수협 결성을 주도했던 최동원을 받아줄 구단은 어디에도 없었다. 2001년 한화 이글스 유니폼을 입고 코치로서 제2 인생을 시작했지만 그가 그라운드로 복귀하기까지는 꼬박 10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다.

당대 최고의 투수로서 한 구단을 위해 온몸을 던져 희생한 영웅이 아니던가. 그에게 은퇴 후 10년은 참으로 혹독하고 원망스러운 세월이었을 듯하다.

그는 헌신의 아이콘이다. 죽도록 힘들면서도 “괜찮아”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까지도 그는 “괜찮아”라고 말했다. 정말 괜찮은 줄 알았다. 그는 세상의 온갖 서운한 감정마저 끌어안고 “괜찮아”라는 말만 남긴 채 거짓말처럼 우리 곁을 떠났다.

영웅이 떠난 부산 사직야구장 한쪽 구석엔 지난해 조성된 최동원 동상이 그의 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생전에 그토록 바라던 롯데로의 복귀를 고인이 돼서야 이룬 셈이다. 말 없는 동상은 영웅과 참 많이 닮았다. 동상은 말 대신 온몸으로 강속구를 품어내며 영웅 없는 시대를 살아가는 씁쓸한 현실을 질타하는 듯하다. 용기도 희생정신도 열정도 잃어버린 우리 시대 몹쓸 이기심을 향해 말이다.

오상민 기자 golf5@e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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